부끄러운 장학금

Ring Idea 2008/01/28 01:15 Posted by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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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87년, 민정당 시절이었죠.

그해 4월이었던가요. 신학기가 되고 얼마 안 있어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만에게 담임 선생님께서 잠깐 교무실로 오라고 하더군요. 상당히 무뚝뚝한 기술과목 선생님이셨죠.

교무실에서 선생님은 대뜸 그만에게 몇월 몇일 경찰서를 가보라는 겁니다. 당신이 우수 청소년 표창이 있는데 그만을 추천해주셨다면서.

무슨 일로 제가 우수 청소년인지, 그리고 왜 경찰서인지 아무런 말씀도 없었고 저도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았나 봅니다. 집에 이런 이야기를 드리니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대요.^^ 아들이 상을 받는다고 하니 좋아하실 밖에요.

경찰서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섰죠. 이미 저 말고도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중학생 절반 고등학생 절반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장소는 중앙에 커다랗고 육중한 목재 테이블이 놓여 있는 대회의실이 아닌가 기억됩니다.

그리고 경찰서장이 들어서자 모두 기립한 뒤 이어지는 행사로 표창장과 장학금 전달식이 있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제게 이 상을 주고 장학금을 주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냥 주니 받을 수밖에요.

경찰서장이 몇 마디 하시고 표창장 및 장학금 전달식 행사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현장에 숨죽이고 있던 학생들에게 경정 정도 되는 분께서 몇 마디 환영의 말씀과 함께 왜 이 상과 장학금을 주는지 알려주시더군요.

공부를 좀 하는데 집안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 시험에서 평균 90점이 넘으면 계속 지급될 것이라고.

아, 그런 것이었군요. 10만원인지 15만원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학교에 내는 공납금이라는 것을 메울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별다른 말 없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뽑아 주는 것이고 앞으로 평균 90점이 넘으면 계속 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죠.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시기였던 그 시절 그 장학금은 집에 보탬이 되는 제가 세뱃돈 말고 처음으로 부모님께 드리는 돈이었지만 제게는 큰 수치였습니다. 저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고 그들보다 뛰어나지 않는 제게 이 장학금은 집안이 어렵다는 '가난 증명서' 처럼 여겨졌으니 말이죠. 다른 친구들에게 이 장학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중 3 초 중간고사였던 거 같네요. 나태해진 저는 평균 89.5점을 받습니다. 하핫.. 그때 얼마나 남몰래 펑펑 울었는지요.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 제가 공부를 잘 하면 계속 받을 수 있어 작으나마 돈이 없어 쩔쩔 매는 어머니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돈이었는데 이제 받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죠.

정기적으로 장학금을 받는 시기가 돌아왔습니다. 초조했습니다. 혹시 0.5점 때문에 안 부르진 않겠지? 또는 까짓거 이제부터 안 받으면 어때 그동안 창피해하며 친구들도 속여가며 받았던 얼마 안 되는 돈인데. 그래도 0.5점이니까 반올림하면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소수점에서 반올림하면 90점이잖아. 별의별 생각에 머릿속이 참 복잡해지더군요.

어떻게 됐냐구요? 중학교 졸업 때까지 무사히 다 받았습니다. ^^;

그렇게 사춘기 시절 부끄러운 장학금을 받느라고 딸리는 머리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안 주대요. ㅋㅋ. 그 부끄러운 장학금 은근히 고등학교 때도 받고 싶었는데 말이죠.

앞에 올린 사진이 바로 제가 받았던 장학금 봉투입니다. 기념으로 갖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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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눈물 나는 기부 프로그램을 잘 안 봅니다. 사실 TV 볼 시간 자체가 없기도 하지만 드라마나 생활 다큐멘터리도 차라리 위트 넘치고 비현실적이거나 저 멀리 내 이야기가 아닌 것을 즐겨 봅니다.

내 근처 이야기, 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현실이 미디어로 비쳐질 때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미디어를 믿지 못하는 병이랄까요.^^

누구나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으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서 사회에 뭔가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도 해봤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죠. 하지만 그러한 성공 스토리는 (광의의)미디어가 우리에게 주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점차 불행해지죠. 이럴 때는 현실 도피를 위해 미디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집니다. 불황일수록 더 화려한 부잣집 이야기나 신데렐라 이야기가 인기를 얻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보상심리와 현실 도피 심리를 미디어가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러한 미디어로 인해 우리의 비참하다고 느끼는 현실이 그다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미디어는 수용자에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하는 주인공을 통해 수용자에게 자신들도 구조적인 불합리를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죠. 또는 일확천금에 대한 환상도 심어줍니다. 신데렐라 이야기나 바보온달 이야기가 현대판으로 반복해서 재생산되면서 이 환상은 사회적 인식으로 굳어집니다. 역으로 극한의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상대적으로 더 행복한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이러한 미디어 속 이야기에는 치밀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천운'이나 '행운', 또는 '우연'을 끼여넣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죠.

미디어는 어느 경우에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과장된 사회의 일면을 반영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미디어는 현실 그 자체일수는 있어도 진실 그 자체일수는 없습니다.

1인 미디어는 이러한 미디어의 속성을 그대로 따라갈까요?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솔직한 매체일 수 있을까요.

딱히 관련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요즘 블로고스피어에서 화제가 되었던 글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들었던 상념이었습니다. 따로 트랙백은 걸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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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성실  수정/삭제  댓글쓰기

    90점이 넘어야 계속 지급이 된다고 한건, 나름 꾸준히,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한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만님의 글은 날카롭기도 하지만, 이렇듯 따뜻해서 더욱 좋더라는....

    2008/01/28 02:14
    • 그만  수정/삭제

      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거 같더라구요. 근데 그때야 그런 건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2008/01/28 02:46
  2. 나인테일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절이 그랬고 당시의 학교와 경찰이 그랬다지만 그만님의 장학금은 그거랑은 상관 없이 자랑스러워 해도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2008/01/28 03:59
    • 그만  수정/삭제

      뭐 지금 생각해도 그닥 자랑스러운 기억은 아니구요. ^^ 그냥 덤덤합니다. 당시로 돌아가라고 해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2008/01/28 16:32
  3. kenu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끄럽다는 것이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군요.
    저도 뇌리에 남는 일은 군대 휴가 나왔는데, 어머니가 공사장 자리 알아놨으니 몇 일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가난은 참 힘든 그늘입니다.

    2008/01/28 05:52
    • 그만  수정/삭제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불편함이 끊임없이 세대를 이어 가게 되는 사회 구조라면 절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이야 밥 먹고 사는 걱정은 안 하지만 늘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과연 나락에 떨어진다면 누가 절 구해줄까요.^^

      2008/01/28 16:33
  4. 여울바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흠..'영화'라는 미디어는 '과장'을 통해서 '사실' 혹은 '현실'을 보여주지 않지만 '진실의 조각'정도는 보여주는데….
    미디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까요?

    물론, '불행'을 만들고 '환상'을 만드는 미디어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래서, '상업영화'의 대부분은 '환상'적인 것을 부각시키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즐거워하죠.

    블로그는 '1인미디어'라고 하는데, 만약 블로그가 '매스 미디어'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대화'를 하려고 하면, 어느 정도 '매스 미디어'의 성격을 담지 않을까요?

    동시에 '블로그'는 '불특정 다수' 뿐만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쓰는 블로그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속에서는 좀 더 '개인'적인 소통의 모습을 보게 되겠죠.

    사실, 언젠가부터 개인들의 이야기가 '매스 미디어'의 속성을 닮아가기 시작했지만요...

    2008/01/28 10:33
    • 그만  수정/삭제

      진실이 여러 형태로 표현되죠. 연극, 영화, 소설 등에서도 조각들은 비유와 상징으로 드러나기도 하고요. 물론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 같아서는 행간 찾는 가슴 떨림을 찾기 힘든 시절인 것만은 분명한 거 같습니다.
      누구나 글을 쓰지만 아무나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겠죠. 아 복잡합니다. 개인에게 매스미디어가 짊어져야 할 짐을 지우는 것이 옳은지도 고민이에요.

      2008/01/28 16:35
  5. 맥퓨처  수정/삭제  댓글쓰기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사업이 망한뒤 그 모든 빚을 장남이셨던 아버지가 안게되어 어린 시절에 구로공단 근처의 소위 쪽방에서 4식구가 모여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 겪은 가난의 기억을 돌아보면 그 때는 많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살아가는데 힘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저보다 부모님이 더 애쓰시고 고생하셨지만요.. 부모님께선 당신에게 주어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로 여기셨고 결국 자식들을 그렇게 키워내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닮아가고 싶습니다..

    2008/01/28 11:23
    • 그만  수정/삭제

      고생스런 기억들.. 그리고 그걸 남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한 구석의 수치스러웠던 기억.. 어려서 그랬던 거 같습니다.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지 굴종의 대상은 아닐테니까요.

      2008/01/28 16:36
  6. 미 탄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흠, 이 동네는 당최 댓글이 희소하질 않아서 인사하기도 어렵군요. ^^ 블로그에 눈뜬 지 일 주일 만에 그만님의 글 여러 편 퍼갔다는 것 정도는 얘기해도 되지요?

    2008/01/28 11:41
    • 그만  수정/삭제

      ^^ 감사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플 방지위원회 활동이 있는지.. 그러네요..^^ 그리 좋은 글은 없는데 필요한 글 있으시면 퍼가셔도 됩니다.^^

      2008/01/28 16:37
  7. the1tree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동의 물결이..
    저랑 동갑이군용 ㅎㅎ

    2008/01/28 12:15
    • 그만  수정/삭제

      아.. 그런가요..^^ 의외로 동년배가 많이 보이네요.. 많은 블로거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2008/01/28 16:38
  8.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 입니다

    2008/01/28 13:57
    • 그만  수정/삭제

      제 블로그 필터링에 문제가 있나 봅니다..ㅠ,.ㅠ 죄송.. 어쨌든 선물을 협찬해주신 inuit님께도 감사를..^^

      2008/01/28 16:39
  9. SJ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고에고...그만님의 글을 읽다보니
    저도 예전 생각이 문득 나네요...ㅎㅎ
    저희 집안 형평이 그리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어떤 단체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집안이 어려워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었는데
    제 생각에 그리 나쁘지 않았던 집안 형편을 생각하며
    장학금 받는 것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자식셋을 키우셨던 저희 아버지 어버지 입장으론
    고맙고 감사할 일이었지만 저보다 더 힘든 형편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조금 마음 한켠이 미안했던 적이 생각납니다...^-^

    ps.보내주신 선물 감사히 너무나 잘 고맙게 ㅋㅋ 받았습니다.
    다이어리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것이 있었지만 보내주신 것이 어찌나 좋던지 ㅋㅋ 회사에서 하나 집에서 하나 이렇게 따로 하나씩 사용하고 있습니다..ㅋ 저 욕심이 너무 많은가요? 호홋~

    2008/01/28 16:14
    • 그만  수정/삭제

      저보다는 약간 배부른 부끄러움이었네요.. ㅋㅋ 농담이구요. 그닥 좋은 선물은 아니지만 유용하게 쓰시길.. 담에는 좀더 좋은 선물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ㅋㅋ

      2008/01/28 16:40
  10. harris  수정/삭제  댓글쓰기

    훈훈한 얘기도 있고 깊게 성찰해야 될 얘기도 있고.. 지금 제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오고 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08/01/28 23:45
    • 그만  수정/삭제

      생각을 복잡하게 해드렸나봐요...^^ 감사합니다.

      2008/01/29 01:25
  11. 준서아빠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보는 그만님의 부드러운글,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2008/02/03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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