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힘, 그리고 천기누설

Column Ring 2007/03/24 10:29 Posted by 그만
익명은 악플러들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견제받지 않고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에 대한 존중이다.

무명씨(익명)의 역할, 사실은 천기누설에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리고 사안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 필요한 것만 드러내고 나머지는 알리지 않은 채 한 가지 사실에 대한 표현만으로 충분해진다.

무명씨는 민주주의 사회의 전통이다. 그래서 무기명 투표를 아직도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에서 내가 누구임을 밝힌 상태로 그 다음의 투표 행위에는 철저한 익명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또한 무명씨는 사회 통계를 객관적으로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소득을 묻고 가정사를 묻고, 유부녀에게 남편 이외의 애인이 있는지를 묻는다. 국가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고 한 사람에 대한 주관적인 지지도를 묻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야 한다. 다만 그 합에 대해서만 모든 사람이 알고 자기가 소수파인지 다수파인지만 파악하면 된다.

그로부터 소수파는 다수파가 되기 위한 투쟁을 벌이면 되고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점을 인정하고 다수파가 되기 위한 전략을 짜기보다 은연중에 다수파로 편입해도 된다.

비난하거나 비난받는 대상은 무명씨들의 집합인 대중이어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사상 때문에 피해받지 않아야 사회가 안전해진다.

또 하나, 내부고발자와 사회부조리 고발자들에게 보호막이 필요하다. 바로 익명이다. 그들은 천기누설의 욕망을 무명씨로 변신해 고발한다.

아고라의 '현직기자가 바라본 조선일보'에서 말하는 이는 '지나가다'다. 우리나라 인터넷에 가장 많은 성이 '지' 씨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가다'를 궁금해 한다. 더구나 '현직기자'라는 힌트까지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더 이상의 호기심은 필요없다. 당당하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당신 동료가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다른 이에게 동료 욕을 할 수 있는가. 정말 동료가 잘못하고 있고 동료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당당'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가 현직기자가 아니고 전직기자든, 홍보담당자든, 공보담당자든 정말 그러한지 사실 여부와 논리적 연결성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다고 본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지, 반박할만한 여지는 없는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사안의 본질에 접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내부 고발에 대해 '비겁자', '배신자' 낙인을 찍기 좋아하고 '음악 표절' 문제를 거론하면 '실패한 음악 지망생' 정도로 고발자를 깎아 내리기 바쁜 이 사회에서 당신은 과연 얼마나 당당하게 살 수 있는가.

익명 제보는 언론에서도 취재원 보호라는 명목으로 관행화 돼 있다. 어쩌면 언론의 덕목 가운데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는 것이 '취재원 보호'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쓰는 기자에게 취재원을 밝히라는 요구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다.

익명과 무명씨가 동원돼 무차별적으로 이용되고 악용되는 사례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이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성은 이러한 무명씨들의 활약을 위축시킨다.

악플러가 싫은 것 뿐, 선의의 고발을 할 수 있는 무명씨가 싫은 것이 아니다.
포르노가 무차별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싫을 뿐, 사적인 성적 교감이 싫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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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BrightListen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읽으면서도 누군가는 '비겁한 사람' 쯤으로 자기 주장을 확고히 관철시키고자 할지도 모르겠네요. 타인이나 스스로에게..

    2007/03/24 11:33
    • BlogIcon 그만  수정/삭제

      약자의 비겁함은 용서받아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강자의 비겁함은 용서받기 힘들죠.

      2007/03/26 01:17
  2. BlogIcon 헐랭이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2007/03/24 15:45
    • BlogIcon 그만  수정/삭제

      제 글을 일고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으셨다니 감사합니다.

      2007/03/26 01:18
  3. BlogIcon rince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 당당했다가 개피를 본적이 있던 사람이라면 그러 주장을 옹호하지 않을겁니다. 저 역시 떴떳하게 의견 개진을 했다가 뒤통수를 맞아본 적이 있던지라... 익명은 내부고발이라던가 부조리를 이슈화 하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취재원 보호도 같은 맥락이겠죠...

    2007/03/24 16:01
    • BlogIcon 그만  수정/삭제

      익명의 보편적 가치는 강자에 대한 강한 저항에 있다고 봅니다. 반면 비겁한 익명은 늘 비아냥과 저질스런 발언만을 쏟아내고는 사라져버리죠. 인생을 담보한 익명 제보는 언제나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2007/03/26 01:19
  4. BlogIcon 학주니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만 악플러를 견제해야 할 장치들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듯 합니다.
    인터넷 실명제를 무조건 찬성하는 측은 아니지만 조건부 찬성에 속하는 축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구조는 익명성을 수용하기에는 아직까지 그 분위기가 수용이 안되는것인지 원. -.-;
    사람이기에 그러한 부분을 악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길려는 쓰래기들이 존재해서 문제가 되겠지요.

    2007/03/24 23:13
    • BlogIcon 그만  수정/삭제

      악플러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는 것이 포털측 통계입니다. 특히 악플러들이 판을 치는 곳은 사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더 튀어보일 뿐이죠. 악플러를 적발하는 기준은 현행법만으로도 거의 처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악플러의 행위가 범죄행위로 판명이 날 정도냐의 문제겠죠. 정말 노래 못하는 연예인 기사에 '노래 못하는 것이 외모만 신경쓴다' 정도의 악플은... 사실 범죄라고 하기에는 뭐하죠.
      어쨌든 주목받고 싶어하거나 쓰레기 발언을 여기저기에 싸질러 놓고 도망다니는 악플러들은 유독 포털이나 디씨쪽에 우글거리죠. 그래서 그런지.. 이 링블로그에는 악플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뭔가..ㅋㅋ

      2007/03/26 01:23
  5. BlogIcon 라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악플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실명제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말씀하신 익명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익명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게 해주는 좋은 글이네요^^

    2007/04/09 15:56
    • BlogIcon 그만  수정/삭제

      결론내리기 매우 힘들죠. 익명의 폐해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모든 행동에 실명을 달겠다는 발상은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며 빅브라더를 용인하는 사회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겠다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죠.
      과유불급이란 말은 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7/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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